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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의 영웅 페르세우스
신과 인간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모험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1/1/2017 |   지면 발행 ( 2017년 1월호 - 전체 보기 )




▲ 안톤 라파엘 멩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지난해에 다룬 주인공들이 대체로 올림포스 12신이었다면, 올해는 ‘영웅’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은 영웅이라 불리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불사(不死)의 몸이어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영웅이라면 응당 겪어야 할 모험이란 것 자체가 신에게는 오락거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영웅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이거나, 인간을 부모로 두었으되 고귀한 혈통과 초인적 능력을 지닌 자 중에서 나온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영웅의 원형은 페르세우스로 간주된다. 가장 유명한 헤라클레스보다 윗세대요, 가장 전형적인 영웅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분리’ ‘초대’ ‘귀환’이라는 영웅의 공식

20세기 최고의 신화학자로 불리는 조지프 캠벨(1904~1987)은 대표적인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고 사회적 환경이 다르지만, 신화나 동화 속 영웅들은 거의 비슷한 길을 걷는다”고 주장했다. 보통 캠벨이 말한 ‘영웅의 여정’을 크게 세 과정으로 정리하곤 하는데, 이를 세분화하면 17단계 혹은 그보다 확대되거나 축소되어 표현된다.

첫 번째 과정은 ‘분리(seperation)’로, 일상을 떠나 모험에 나서는 부분이다. 주인공은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어떠한 기회를 발판 삼아 소명 의식을 가지고 모험을 떠나는데, 그 소명에 부담감을 갖고 주저할 때 초자연적 힘의 도움을 받아 난관을 통과하고, 구약성서의 요나처럼 어두컴컴한 고래 뱃속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과정은 모험에서 핵심적 요소가 되는 ‘초대(invitation)’다. 주인공은 시련을 겪는데, 신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모험을 방해하는 유혹자를 만나기도 한다. 이런 시련을 통해 불화 관계에 있던 상대와 정신적 화해를 하고, 신격화의 경지를 경험하거나 궁극의 은혜를 입는다.

세 번째 과정은 ‘귀환(return)’이다. 주인공은 귀환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에 머물거나 적의 추적을 따돌리고 절묘하게 탈출하거나 외부로부터 구조되기도 한다. 마침내 관문을 통과하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면, 두 세계의 스승이 되어 삶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간다.

이상의 영웅 공식을 염두에 두고 페르세우스의 모험을 추적해보자.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딸 다나에 공주가 낳을 아들, 즉 외손자에게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에 놀라 다나에를 밀폐된 청동 탑(혹은 지하의 청동 방)에 가둔다. 남자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예쁘다면 신이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제우스가 다나에의 소문을 들었을 땐, 이미 그녀가 청동 탑에 갇힌 뒤였다. 게다가 벽을 얼마나 꼼꼼히 막았는지, 자유자재로 변신 가능한 제우스조차 접근할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생각한 묘안이 액체 형태로 작은 빈틈을 타고 스며드는 것이었다. 황금의 비로 변신한 제우스는 다나에를 적시며 사랑을 나눴다. 클림트의 ‘다나에’는 그 순간을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이로 인해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외손자 페르세우스가 태어나자, 아크리시오스는 차마 갓난아기를 죽이지는 못하고 다나에와 함께 큰 궤짝에 넣어 먼 바다로 띄워 보냈다. 궤짝은 세리포스 섬의 선량한 어부 딕티스에게 발견됐고, 그는 페르세우스를 양아들로 키웠다.

그러나 이내 페르세우스는 영웅의 첫 과정인 ‘분리’를 겪게 된다.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테스가 그의 모친인 다나에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에 페르세우스는 모친을 구하기 위해 메두사의 목이라도 갖다 바치겠노라고 폴리덱테스에게 실언을 하고 만다. 메두사는 흉측한 얼굴과 뱀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로, 그 얼굴을 보면 누구나 돌이 되어버린다는 마녀였다. 그 목을 베어 무적의 무기로 사용하려는 용사들의 도전이 이어졌으나, 모두 돌로 변해버렸을 뿐이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가 사는 먼 서쪽을 향해 목숨 건 모험을 떠난다.

신들의 도움을 받아 세리포스로 돌아오기까지

두 번째 과정 ‘초대’에서는 지혜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가 나타나 거울처럼 비치는 방패를 건네주며 페르세우스를 돕는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강력한 낫을 주었고, 아테나가 가르쳐주어 찾아간 세 노파도 빠른 이동에 필요한 도구들을 얻는 방법을 일러준다. 이렇게 신들의 도움으로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메두사와 마주친 페르세우스는 방패에 비친 메두사를 보고 공격해 그 목을 자르는 데 성공한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에선 하늘을 나는 말 페가수스가 탄생한다.

이제 세 번째 과정인 ‘귀환’이다. 페르세우스로서는 메두사의 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좋은 토양도 아닌 데다, 세리포스 섬에 남은 모친 다나에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귀환하는 도중에도 갖은 작은 모험을 겪는데, 북아프리카에서는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거인 아틀라스와 시비가 붙어 메두사의 머리를 꺼내 그를 돌산으로 만들어버렸다. 에티오피아에서는 교만한 왕비 카시오페아가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바다 괴물의 제물로 바쳐진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인 사이가 된 안드로메다와 함께 세리포스로 귀환한 페르세우스는 폴리덱테스를 찾아가 그 역시 돌로 만들어버리고, 새 왕으로 양부 딕티스를 앉힌다. 메두사의 목은 아테나의 방패에 박아 여신에게 돌려준다. 아테나의 방패 아이기스(영어로는 ‘이지스’라 읽는다)가 적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하는 무적의 방패가 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런데 세리포스로의 귀환은 페르세우스에게 완전한 귀향이 아니었다. 태어난 고향은 아르고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고스에 도착한 페르세우스는 조부이자 왕인 아크리시오스가 벌써 어딘가로 도망쳤음을 알게 된다. 후에 이웃나라 라리사를 방문한 페르세우스는 운동 경기에 참가하며 원반을 던지는데, 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 원반이 관객석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관중으로 있던 아크리시오스를 맞춰 결국 죽게 만든다. 결국 신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죄책감에 아르고스의 왕이 되는 것을 마다하고 이웃나라 티린스를 다스리던 사촌과 영토를 바꾸어 그곳의 왕이 된다.

영웅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 프랑스 아틀리에 오페라 ‘페르세’

페르세우스 신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메두사의 목을 자르는 장면인데, 무대극으로 구현하기엔 기술적 한계가 명확했다. 따라서 페르세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본격적인 음악으로 떠오르는 것은 륄리의 프랑스 오페라 ‘페르세(1686)’ 정도에 머무른다. 프랑스 궁정 오페라의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페르세’는 메두사 제거라는 사건 이상으로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공주의 사랑을 극의 중심으로 다루었으며, 음악적으로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확장하여 노래에 붙인 최초의 프랑스 오페라로 기록된다.

영웅의 원형인 페르세우스를 직접 다룬 오페라는 하나밖에 소개하지 못했지만, ‘영웅의 여정’을 다룬 오페라는 그 외에도 충분하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자주 다루던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중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이아손이 주인공인 오페라들이 대체로 그러한데 이는 다음 연재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9세기 이후 오페라에선 신화나 역사극 대신 멜로드라마가 대세로 떠올랐지만, 서사적 내용을 선호한 독일 오페라에선 페르세우스 같은 영웅담을 다룬 작품을 여러 편 찾아볼 수 있다. 모차르트 ‘마술피리(1791)’에서는 타미노 왕자가 모험을 떠난 자라스트로의 땅에서 귀환하지 않고 그곳의 일원으로 남는다. 베버 ‘마탄의 사수(1818)’에서는 막스가 사악한 사냥꾼인 카스파르의 유혹으로 ‘악마의 계곡’을 찾아가는 것이 모험의 시작이다. 바그너의 ‘로엔그린(1850)’은 성배의 기사인 주인공이 모험을 위해 도착한 브라반트 공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따라서 엔딩은 로엔그린이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바그너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든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는 조금 다른 맥락을 지닌다. 3부와 4부에만 등장하는 주인공 지크프리트는 모험을 떠났다가 귀환은커녕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작의 진정한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라인의 황금으로 만든 ‘반지’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알베리히가 처음 만들고, 보탄이 잠시 지녔다가 파프너가 감춰두었던 반지는 결국 지크프리트에게 발견돼 신부 브륀힐데에게 넘겨졌다가 다시금 지크프리트의 수중에 들어온다. 4부 ‘신들의 황혼’ 말미에선 결국 라인의 처녀들에게 돌아간다. 그야말로 길고 긴 모험 뒤, 완벽한 귀환이다.

기악곡에 담긴 핀란드의 영웅

기악곡으로는 시벨리우스가 핀란드 신화 ‘칼레발라’에서 영감받아 작곡한 여러 개의 교향시를 꼽고 싶다. ‘칼레발라’는 19세기 전반기에 수십 년간 핀란드 부족 사이를 순회 진료하면서 단편 시들을 채집한 뢴로트라는 의사가 이 시들을 서사시의 편린이라 가정하고, 살을 붙여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만든 창작물이다. 많은 학자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핀란드의 민족의식과 문화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고 시벨리우스 또한 이 부분에 경도했다.

‘칼레발라’의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뵈이네뫼이넨은 공기의 여신에게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으로, 영원한 현자이며 음유시인이다. 일마리넨은 부(富)를 가져오는 ‘삼포’라는 도구를 만든 장인이며, 모두가 원하던 포흐욜라의 처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잘생긴 레민캐이넨은 오만한 바람둥이여서 사지가 찢겨 죽지만 모친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어 되살아난다. 로우히는 칼레발라 사람들의 적수인 북쪽 포흐욜라의 족장이자 포흐욜라 처녀의 모친이다. 쿨레르보는 갓 태어난 시기에 요람에서 너무 많이 흔들린 탓에 정신적으로 장애를 얻은 악당이지만 동시에 비극적인 영웅이기도 하다. 시벨리우스는 여러 편의 교향시에서 ‘칼레발라’를 다루었는데, ‘쿨레르보(1892)’ ‘투오넬라의 백조’가 포함된 ‘4개의 전설(1896)’과 ‘포흐욜라의 처녀(1906)’ ‘타피올라(1926)’가 그 예다. 필자는 시벨리우스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일곱 개의 교향곡 하나하나에서도 추상적이기는 하나, ‘칼레발라’에서 비롯된 정서와 뉘앙스가 담겨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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